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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다시 태어났다
 
 
아내를 만나 연애를 시작할 때, 나는 내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수치스러워 숨기고 싶었다. 지울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알코올 중독 아버지, 교회에 지나치게 몰두하던 어머니, 폭력, 학대, 우울증, 자살충동, 방황하던 청소년기.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내겐 오직 현재만이 중요했다. 과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고통스런 과거를 살아왔지만 아내를 만났으니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내게 결혼이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선포하는 선언식이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보증금 5백만 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허름한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당시 전도사로 사역했던 교회는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재정적인 지원이 부족했다. 월세 내고, 아기 키우고, 신학대학원에 다니려면 돈이 필요했다. 낮에는 대학원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사역을 했다.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라며 견디고 견뎠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아무리 노력해도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몸과 마음은 지쳐갔다.

어느 날, 아내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월세가 다섯 달이나 밀렸어. 기저귀는 떨어진 지 오래고, 분유는 어제 떨어졌어.”

만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아내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고! 나도 최선을 다하잖아.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가 없어.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다 끝났어. 더 이상 못하겠다고!”

내 안의 상처가 미치도록 아파서 아내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그때 하필 나는 거울 앞에 서 있었는데, 내가 한 마리 짐승처럼 보였다. 과거, 나 자신과 약속했다. 절대 경제적으로 무능한 사람, 폭력적인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그런데 그런 모습으로 서 있는 나를 보며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울고 있는 아내를 내버려둔 채 뛰쳐나왔다.

그리고 사흘 밤낮을 차 안에서 지냈다. 무엇을 향한 분노인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기도도 할 수 없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기운이 없었던 탓인지 열이 났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그때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한 달 전, 어머니로부터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꼴이 우스웠다. ‘내 부모의 결혼이 끝난다. 내 결혼도 끝나간다….’

아버지는 이메일로 A4 용지 60장이 넘는 긴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는 그간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가족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직접 써 내려간 편지를 읽으면서 그가 나인지, 내가 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가 불쌍했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 상처를 직면하고, 일어서서 새롭게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쇠문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인기척을 듣고 아내가 문을 열었다. 나는 말없이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싶었지만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출력해온 아버지의 편지를 식탁에 내던지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읽고 싶으면 읽고, 버리고 싶으면 버려.”

아내와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신경이 예민해지니 작은 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아내가 식탁으로 걸어가는 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앉는 소리 모두 생생하게 들렸다. 한 장씩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는데 밖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방문이 열렸다. 아내가 다가와 이불을 들추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내게 말했다.

“여보, 살아줘서 고마워.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견뎌줘서 고마워.”


마음속에서 번개가 치고, 폭풍이 일어났다. 아내의 눈물이 내 얼굴에 떨어져 내 눈물과 섞였다. 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 품에 안겨 아기처럼 밤새도록 울었다. 그날 밤, 나는 다시 태어났다. 포기하고 싶었던 그 순간,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외로우면 외롭다고 말하라』 중에서
(김유비 지음 / 규장 / 280쪽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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