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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흙수저와 정서적 금수저
 
 
최근 육아정책연구소가 펴낸 『한국인의 부모됨 인식과 자녀양육관 연구』라는 책에는 20~50대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가 나옵니다. 그에 따르면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덕목’ 1위로 경제력(21.8퍼센트)이 꼽혔습니다. 또한 ‘바람직한 부모가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 1위 역시 경제력(33.1퍼센트)이었습니다.

이 조사 결과처럼, 돈이 부모의 가장 큰 덕목이자 좋은 부모가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일까요? 그렇다면 미국에서 연봉 수십만, 수백만 달러를 받는 대기업 간부, 정관계의 고위직 종사자, 할리우드 스타 등 유명인의 자녀들이 과연 돈이 없어서 마약 중독이나 범죄 등 각종 문제를 일으키고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것일까요? 또 돈이 문제라면 오스트리아 같은 복지 선진국에서는 왜 청소년들이 정서적 흙수저가 되어 방황하는 것일까요?

밤 11시 이후 지방 중소도시의 역이나 터미널 근처에 가면 교복을 입은 남녀 중고등학생들이 짙게 화장을 하고 술과 담배와 휴대전화를 들고 웃거나 껴안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 정문 앞에서 보았던 청년 노숙자들, 비엔나 공원에서 마약에 취해 있던 소년, 이성과 밤늦게까지 유흥가를 돌아다니는 한국의 미성년자들, 게임 중독에 빠진 아이들, 그들은 부모의 사회 경제적 수준과는 무관하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릴 때 안정적인 애착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문에 대한 근본적인 답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의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애착 연구의 선구자 존 볼비(John Bowlby) 박사가 끈질기게 파고든 결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70여 년간 존 볼비 박사를 비롯하여 영국, 미국, 캐나다 심리학자들과 아동발달학자들이 방대한 연구를 통해 중요한 사실을 알아낸 것입니다. 그 답은 바로 ‘애착’ 문제였습니다.

애착이란 무엇일가요? 존 볼비 박사와 그의 동료였던 발달심리학자 메리 에인스워드 박사의 정의에 따르면 애착이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깊고 지속적인 유대감’을 뜻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은 아동을 위한 특별한 보육 정책을 만들었습니다. 독일군의 집중 폭격에 취약한 런던 같은 대도시에 사는 어린아이들을 폭격이 덜한 농촌으로 대피시키자는 정책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영국의 아동 대피 프로젝트입니다. 아동 대피 프로젝트는 영국의 황실, 정부, 전문가들이 뜻을 모아 실시한 아동 보호 정책으로, 영국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을 보다 안전한 곳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상으로 돌봐주자는 훌륭한 국가 정책으로 여겨졌습니다.

정부는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부모들은 앞다투어 ‘애국적’ 아동 대피 프로젝트에 동의하여 자녀들을 농어촌, 심지어는 영연방이었던 캐나다,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해외로까지 피난을 보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도시 인구의 3분의 1 정도(약 375만 명)가 이 국가적 아동 대피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약 82만 7,000명의 학령기 아동과 수십만 명의 영유아들이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 동안 부모와 떨어져 낯선 가정이나 임시 보호소에 맡겨졌습니다. 이때는 아직 애착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믿을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의 좋은 취지와 달리 낯선 가정에서 낯선 양육자들에게 맡겨졌던 아이들 중에는 병들거나 심지어 사망한 아이가 많았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아이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불안증, 우울증, 집중력 저하, 학습 곤란 등 많은 심리적·정서적 문제를 겪었습니다. 영유아들은 폭격 속에서라도 부모와 같이 있을 때 더 안전감을 느끼고 잘 견뎌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세계보건기구(WHO)의 자문관이면서 영국의 타비스톡 인간관계 연구소 부소장이었던 존 볼비 박사는 아동 대피 프로젝트로 인해 부모와 갑자기 헤어진 어린아이들의 심리적 고통과 문제를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는 아무리 의도가 좋았다 하더라도 영유아들에게 양육자와의 갑작스런 결별은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로서 장기적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볼비 박사의 연구와 임상 경험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여러 나라에서 전쟁으로 인해 부모와 헤어지게 된 난민 아이들의 문제를 조사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볼비 박사는 아이가 피부 접촉, 눈 맞춤, 수유, 놀이 등을 통해 양육자와 직접 경험하는 친밀하고 안정적인 관계 속에서 정신 건강의 토대가 구축된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기는 배가 고프면 울면서 젖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요구에 양육자가 잘 응해주면 애착 관계가 형성됩니다. 또한 놀라거나 무섭거나 슬플 때처럼 아이에게 누군가의 정서적 돌봄, 위로, 공감적 이해가 필요할 때 친절하고 인내심 있게 대해주는 어른을 아이들은 믿고 따릅니다. 애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아이와 함께 재미있게 노는 것도 애착 형성의 주요소입니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아기는 공포와 불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기는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기에 보호자가 옆에 있어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지요. 특히, 배가 고프거나 어딘가 아프거나 무서울 때 아이들은 혼자서 문제를 이해하거나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돌봄이 필요한데, 이럴 때 아무도 곁에 없거나 있어도 도움을 주지 않거나 되레 야단을 친다면 아이는 버려진 느낌과 불신감을 느끼게 되고, 스스로를 무가치하고 나쁜 존재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런 기분입니다. 이런 일이 영유아기에 반복될 경우 아이의 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최근 뇌 연구에 따르면 영유아기의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자율신경계에 손상을 줄 만큼 뇌의 편도체, 해마, 시상하부, 뇌하수체, 부신피질 등의 구조와 기능에 이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합니다.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나 중요한 욕구가 있을 때 돌봄을 기대한 대상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거부당하거나, 버림받은 상처를 ‘애착손상’이라고 합니다. 애착손상을 입으면 사람에 대한 믿음이 낮아지고 결국 사람에게 버림받을 거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머릿속에 불신, 불안, 두려움으로 이루어진 내적 도식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면 이후에 부모, 친구, 연인, 배우자 등 친밀한 관계에서 일상적인 거절이나 거부를 당해도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나 무시로 여길 수 있고, 그 사람을 잠시 보지 못해도 영원히 버려질 것 같은 절망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음에 부정적 감정이 꽉 차 있으면 결국 부정적 생각이 머리를 채웁니다. 부정적 ‘인생 대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생 대본이란 마치 영화의 대본처럼 자기 삶의 등장인물, 대사, 테마, 플롯, 결말 등을 만들어가는 생각의 패턴이자 삶의 기본 도식입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어차피 나는 안 돼’, ‘해봤자 소용없어’, ‘세상은 차갑고 무서워’. 이러한 인생 대본을 갖고 있다면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실패자가 됩니다.

본인의 미래에 대해 절망적으로 생각하고, 미리 판단하고 주저앉는 사람이 바로 정서적 흙수저입니다. 애착손상은 정서적 흙수저가 될 확률을 높입니다. 정서적 흙수저의 모습이 인간의 발달 단계상 어느 시기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애착손상이 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이런 증상들이 서로 맞물려 있어서 한 문제가 다른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유치원 시절에 유난히 부모와 떨어지기를 불안해하던 아이가 초등학교에서는 수업에 집중을 못하고, 중학교 때는 왕따나 폭력의 대상이 되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자퇴하고 게임 중독에 빠지는 식입니다.

몇 해 전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산타페라는 휴양 도시에서 한 미국 대기업의 CEO 연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수 도중 비교적 젊은 편인 40대 한 CEO가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유치원생인 막내가 자전거를 타다가 다쳐서 병원에 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부인은 그에게 집으로 빨리 와달라고 했고, 그 CEO는 이틀 남은 연수를 뒤로하고 서둘러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의 집은 시카고에 있었는데, 산타페에서 자동차로 20시간, 비행기로는 약 세 시간이 걸리는 장거리였습니다.

한편, 이 소식은 그 기업의 회장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신임 CEO의 이런 행동에 회장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한국 같았으면 당장 해고령이 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회장은 그 CEO의 이야기를 듣고 선뜻 허락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가족에게 가길 재촉하며 회사 전용기까지 내주는 배려를 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미국에서도 1980~90년대까지는 이런 일은 꿈도 못 꿨습니다. CEO에게는 천문학적 연봉을 주는 만큼 철저히 ‘부려먹는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막대한 돈을 들여 스카우트한 우수 인재들임에도 오래지 않아 회사에 대한 기여도가 크게 줄거나 실수와 결근 등으로 애물단지가 되는 일이 잦아졌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 원인을 조사해 보니 대개 불안정한 결혼 생활이나 이혼이 문제였습니다.

일에 몰두하거나 회사에 지나치게 충성한 결과 기업의 인재들은 가정생활에 소홀해지면서 불화, 외도, 이혼 등을 겪게 된 것이었고, 그것은 다시 업무 효율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가정이 행복하지 않으면 기업 입장에서도 이만저만한 손실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주의를 부르짖던 미국과 유럽에서 이제는 앞다투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내세웁니다. 무수한 연구들이 한결같이 ‘결혼의 이점’을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이혼을 하면 개인의 업무 효율이 반감되고, 원상태로 회복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가정의 애착관계가 무너질 때, 그것은 아이에게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큰 타격이 된다는 것이겠지요.

- 『정서적 흙수저와 정서적 금수저』 중에서
(최성애·조벽 지음 / 해냄 / 312쪽 / 16,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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