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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형수가 보낸 편지
 
 
(황용희 지음 / 멘토프레스 / 294쪽 / 12,000원)

내가 처음 교도관으로 이곳에 왔을 때 삽살개 한 마리가 갈기를 세우고 달려들 기세였는데 이제는 날 보고 꼬릴 흔드니 세월이 무던히도 흘렀나 보다. 눈가 주름 잡힌 것으로 보아 이제 그만 섬에서 빠져나올 때가 됐다는 느낌이 든다. ‘교정마을’을 떠나야 한다 생각하니 아련한 기억이 발길을 붙든다. 황량하기가 마치 달표면 같은 이곳에서 많이 애달팠어도 쉽게 잊혀질 것 같지 않다.

이곳에서 김용제를 만났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의도 자동차 질주사건’의 범인을. 집필실에 나온 그는 낡은 푸른 옷차림으로 체격이 왜소한 사람이었다. 22세 젊은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몸이 약했고 얼굴에 어린 티가 가득했다.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하는 것이 마치 세상의 희로애락을 다 겪은 노거사의 음성 같았다. 그는 배운 것도 없고 심한 악필이어서 소송서류 작성에 직원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번에도 항소이유서다. 먼저 그가 초안을 잡고 내가 살을 붙여 정서한 다음 그에게 읽어준 뒤 일부 수정을 가하여 완성하는 식이다. 난시에 시력이 몹시 나쁜 그는 영세가공회사에 들어가 일을 했지만 얼마 견디지 못하고 나오기 일쑤였다. 시력 때문에 물건을 잘못 만들거나 오히려 흠집을 내 주인에게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어려서부터의 가정폭력과 찌든 가난, 못 배운 한, 그로 인한 나약한 심성은 김용제를 나락으로 잡아끌었다. 그는 중국집 배달원, 공장, 막일을 전전하며 일거리를 찾다 겨우 한 곳에 취직이 되었으나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또다시 일자리를 잃자 절망과 좌절,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여의도에 나타나 인파를 향해 차를 몰았다. 그 사고로 2명이 숨지고 2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망자 가운데는 이제 여섯 살밖에 안 된 윤아무개가 들어 있었다. 어느 생명인들 가벼운 게 있으랴만 채 피지도 못하고 꺾인 여섯 살배기의 희생은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이듬해 여름, 서울고등법원 형사부 법정에서 김용제에 대한 선고공판이 있었다. 피고인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재판은 10여 분 만에 끝났다. 방청석에서 재판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숨진 아이의 외할머니는 담당검사를 찾아가 김 피고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수갑과 포승으로 꽁꽁 묶인 김용제는 눈물을 쏟으며 할머니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할머니는 손수건을 꺼내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범인의 얼굴을 닦아주고 두 손을 꼭 잡으며 “용서한다”고 말했다. 살인범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당당하게 받아들이거라”고 당부한 할머니는 저시력으로 좌절을 느끼고 방황했던 죄인에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안경을 씌워 남은 생을 올바로 살아가도록 해주겠다며 안경점으로 향했다.

그 후 할머니는 김용제의 구명운동에 나서 재판부에 감형 탄원서를 제출했으며 구치소에 추기경을 모시고 가 영세를 받게 했다. 김용제는 참회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용서만큼 어려우면서도 쉬운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용서를 받으며 천국으로 향하는 그의 마음이 기쁨에 차 있었으리라 믿는다.

김용제가 서울구치소로 떠나고 네댓 달이 지난 어느 날 우편함을 열었더니 편지 한 통이 들어있었다. 그가 보낸 것이었다. 대법원에서 상고기각 판결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이 엄청난 사실을 담담히 전하고 있었다. 오히려 고척호텔(교도소)에 머물 때 잘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건강 꼭 챙기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편지 글 한가운데 내가 그에게 주었던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첫 구절이 적혀 있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곳으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이 대목에서 청년은 마치 예언자적인 현자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는 듯했다. 인간은, 생을 마감하는 엄숙한 순간에 한 말이 가장 진실하다. 볼펜을 꾹꾹 눌러쓴 악필이지만 정성 가득한 글을 읽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용제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서찰 속에는 이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목숨 내놓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청년을 조용히 놓아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나는 편지를 들고 강으로 갔다. 강가 긴 둑에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나는 편지를 접어 종이배를 만들어 물에 띄웠다. 물살에 떠밀린 종이배가 강물을 따라 내려간다. 그곳에서 바다와 만나 몸을 합친 뒤 아득한 피안의 세계로 떠나가리. “잘 가거라. 무엇보다 편히 쉬어야 한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종이배가 성산대교 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발길을 옮겼다.

- 『가시 울타리의 증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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