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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하고 부드러운 넝쿨손처럼
 
 
어린 시절 저는 넓은 마당이 있는 오래된 한옥에서 살았습니다. 우리 집에는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올 정도로 아름다운 꽃밭이 있었습니다. 꽃을 사랑하시던 아버지의 작품이었지요. 아버지는 퇴근하고 오시면 양복을 벗고 간편한 한복으로 갈아입은 후 석양 무렵의 꽃밭에 나가 항상 물을 주셨습니다.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작은 양철 물뿌리개를 들고 ‘유능한 조교’ 역할을 하던 제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버지와 함께 꽃밭에서 지냈던 시간과 집에 들어서면 내 후각과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던 어머니의 간식 만드는 냄새가 어린 시절의 가장 행복한 추억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린이다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신 부모님께 보답할 겨를도 없이, 부모님은 제가 유학 중일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꽃 사랑 DNA가 제 속에 아주 깊이 숨어 있었나 봅니다. 어느 날 우연히 한국 TV프로그램에서 한 여자아이가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라는 동요를 부르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꽃밭 앓이’를 시작했습니다.

제 소원이 하늘에 전해졌는지 교수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꽃밭을 만들 기회가 생겼습니다. 교수 숙소를 다른 건물로 옮기면서 그곳 옥탑방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거실 문을 열면 바로 옥상의 큰 공터로 연결된 그곳은 양쪽으로 뉴욕의 강들이 보이고 저 멀리 조지 워싱턴 다리가 보이는 시원한 공간이었지요. 저는 정원사까지 동원해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옥상이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바람이 불고 추운 탓에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다 지쳐 그냥 포기해 버렸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새가 물어다 준 씨인지 바람에 실려 온 씨인지 제가 심지도 않은 것들이 싹을 틔우더니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옥상의 더위와 추위에도 끄떡하지 않고 스스로 잘 커서 옥상 녹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덕분인지 이제는 다른 나무와 꽃들을 심어도 잘 자랍니다.

지금 옥상 정원에는 포도가 주렁주렁 열린 포도나무, 사과나무, 넝쿨 백장미, 등나무, 라일락, 찔레꽃, 키 큰 해바라기, 수국, 코스모스, 나팔꽃과 라벤더, 재스민, 로즈메리, 오래가노, 민트 등 각종 허브들과 상추, 무, 당근, 브로콜리, 파, 케일 등 채소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자랑하고 싶은 제 정원이 생긴 겁니다.

얼마 전 제 옥상 정원에서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5년 전 뉴저지 화원에서 사온 아기 등나무 세 그루가 있었는데, 5미터도 넘게 자라 무성한 잎으로 푸른 그늘을 만들어 준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지난봄, 한 등나무가 무슨 일인지 싹을 틔우지 않았습니다. 나는 거름도 줘 보고, 물도 더 자주 주고, 음악을 들려주며 “사랑한다”, “힘내라”, “보고 싶다” 매일 속삭였습니다. 가지를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도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 등나무는 다른 두 그루의 꽃이 다 진 6월 중순까지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푸르른 다른 나무들 속에 혼자 앙상한 채로 있는 모습이 을씨년스러워 파 버리고 다른 나무를 심을까 생각했지만, 그 등나무를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1년만 옥상 정원에 더 두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동네 화원에서 우연히 아기 등나무 화분을 보게 되어 집에 가져와 죽은 등나무 바로 옆에 놓았습니다. 일주일쯤 계속 비가 내렸고, 아기 등나무는 쑥쑥 자라 부드러운 연두색 넝쿨손으로 죽은 등나무를 감고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6월 말쯤 되었을까요? 아침에 물을 주러 정원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탄성이 절로 나왔지요. 죽었다고 생각했던 키 큰 등나무가 하얀 꽃들을 여러 송이 피워 낸 겁니다! 얼마나 기쁘고 고맙던지 가슴이 막 뛰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제게는 정말 기적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무엇이 죽은 듯 잠자던 이 나무를 다시 살아나게 했을까요? 생물학자들은 여러 과학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하겠지만, 저는 옆에 서 있던 아기 등나무의 연약하고 부드러운 넝쿨손의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힘, 죽어 가는 것을 살려 내는 그 힘에 저는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저에게 꽃 사랑을 가르쳐 주신 아버지는 가셨고, 제 뒤를 따라다니며 물을 줄 아이는 없지만 제게는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들이 있습니다. 한창 더운 여름밤, 학생들을 초대해 꽃들이 활짝 핀 지붕 위 정원에서 촛불을 켜고 파티를 했습니다. 옥상 정원에서 나온 채소와 허브들로 음식을 해서 말이지요.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던 학생들이 말했습니다. “교수님, 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향기 나는 음식을 먹으니 마음의 상처들이 치유되는 것 같아요.” “여기가 바로 파라다이스네요.”

학생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는데, 그들 뒤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웃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부모님께 미소 지으며 40년이나 밀린 인사를 했습니다. “아빠의 꽃밭, 엄마의 집 밥, 제 삶의 기둥입니다. 정말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 『연약함의 힘』 중에서
(현경 지음 / 샘터 / 295쪽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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