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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엄마를 부탁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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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모시는 둘째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러니 이틀 후에 있을 정기검진에 대신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줄 것을 요청해 왔다. 동생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터라, 웬만한 일은 들어주는 편이다. 그날 역시 그러겠노라고 주저 없이 대답했다.
노인병을 앓고 있는 노모는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는다. 예약을 해놓고 가기는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두어 곳을 찾아가 검진을 받고 약을 타고, 다음 예약까지 마치면 그날은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자면 하루 휴가를 내야 했다. 하지만 회사 일정을 살펴보니 휴가를 내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아내 역시 직장에 다니고 있는 처지인지라 며칠 전에 미리 말하지 않으면 나와 다를 바가 없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알고 나면 공연히 마음만 쓰일 것 같아서 아내에게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해결책을 모색하던 중 떠오르는 딱 한 사람이 있었다. 대학에 수시합격해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는, 식구들 중 가장 여유가 많아 보이는 둘째 딸이다.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오라고 부탁해야겠는데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요즘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는 가정이 드물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는 경우 손자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라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서 스스로 생활할 때쯤이면 대부분 따로 살게 된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서는 할머니 손에 자랐던 어릴 적 기억은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고 만다.
맞벌이 부부인 우리를 위해 장모님은 세 아이를 맡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돌봐 주셨다. 처가에 행사가 있어서 외할머니를 만나게 되면 큰아이는 멋쩍은 듯 인사만 건넬 뿐 별 얘기가 없다. 외할머니로부터 한글과 숫자를 깨우친 막내 녀석도 눈인사가 고작이다. 그러나 둘째 딸은 조금 다르다. 소탈한 성격 때문인지 할머니의 손을 잡고 반가워하기도 하고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지 행사가 끝날 때까지 외할머니 곁에 붙어 있다시피 한다. 헤어질 때는 눈물을 글썽거린다.
그런데 친할머니와의 관계는 다르다. 명절 때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 만나는 것이 전부다. 둘째가 고3이어서 공부 핑계로 본가에 얼굴을 비치지 않자 어머니가 얼굴 잊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두고 보게, 나중에 작은딸이 자네에게 제일 잘할 걸세, 라며 둘째 딸 편을 들었다. 어머니의 손녀 사랑과는 달리 그 아이에게 할머니에 대한 정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을까 궁금했다.
몇 번 망설이다가 딸에게 전화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서연아, 아빠가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부탁 하나만 하자.” “뭔데요?” “별일 없다면 모레 할머니 모시고 병원에 좀 다녀와 줄 수 있을까?” “네, 알았어요.” 딸은 웬일인지 흔쾌하게 그러겠다고 했다. 순간 속이 시원하게 뚫렸다. 고마웠다. 고맙다는 말을 재차 하자 자신의 할머니 일인데 당연한 거 아니냐며 외려 의아해했다.
병원에 가는 날, 혹시 늦잠 자느라 예약시간을 놓칠까 봐 출근길에 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작은딸, 우리 엄마 잘 좀 부탁해.”
더불어 병원검진이 끝나면 할머니에게 맛있는 점심을 사드리라는 부탁과 함께 평소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이며 어머니를 모시고 들렀던 음식점 위치를 알려주었다. 딸에게 ‘우리 엄마’라는 말을 쓰는 것이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하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왠지 딸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아들에게 기대야만 하는 병약한 어머니의 마음이 이러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딸아이가 음식을 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왔다. 부엌일을 놓기 전에는 동짓날이면 잊지 않고 동치미와 함께 팥죽을 끓여주던 어머니가 사진 속에서 팥죽을 들고 계셨다.
“아빠가 시키는 대로 고깃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할머니가 이곳으로 가지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사진 속 어머니의 모습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아이에게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잠시 후 답장이 왔다.
“ㅋ ㅋ 별말씀! 아방(아빠)도 우리 엄마 잘 좀 부탁해.”
- 『도시의 달』 중에서
(이현재 지음 / 북인 / 232쪽 / 12,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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