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2퍼센트를 위하여 |
 |
| |
|
|
그는 대구에서 꽤 잘나가는 중소기업 사장이었다고 했다. IMF로 회사 문을 닫자 살길이 막막해 아내와 아이들을 시골의 부모님에게 보내고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왔다. 서울역에서 사흘을 지냈다.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었다. 저혈당으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떠는 그를 보고 누군가가 영등포역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 그 근처에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약도 주고 잠도 재워 주는 병원이 있다고 했다.
그가 처음 요셉병원에 왔을 때 의사인 선우 원장님은 처방전에 ‘밥, 방한 점퍼, 인슐린’이라고 썼다. 그는 선우 원장님의 처방대로 따뜻한 밥을 먹고 방한복을 입고 인슐린 주사를 맞고 살아났다. 그날부터 40대 노숙인 환자와 선우경식 원장님, 두 사람의 끈끈한 우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병원 안에서 그 우정을 응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약사인 나부터 그랬다. 짧게는 두 달, 길게는 석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약제실 바닥에 시중에서 수거해온 정체불명의 약을 쏟아내고는 10만 원씩 챙겨가는 그의 모습은 사기꾼 그 자체였다. 그러나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어 주는 선우 원장님 ‘빽’을 등에 업고 오히려 기세등등하니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급기야 노숙인, 아니 사기꾼을 향한 선우 원장님의 편애가 도마 위에 올랐다. 병원 형편도 어려운데 ‘10만 원의 부당함’이 월례회의 주요 안건으로 등장했다. 그가 배낭 가득 수거해와 산더미처럼 쌓인 약을 폐기처분하려면 금전적 손해가 크다는 나의 주장과 설득에 모두가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 단 한 사람, 선우 원장님만 빼고. 표결은 1대 9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근간인 다수결의 원칙도 원장 빽 앞에서는 무력했다.
끝을 알 수 없던 두 사람의 우정은 의외로 쉽게 막을 내렸다. 언제부턴가 사나이의 발길이 뚝 끊긴 것이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그가 요셉의원을 떠난 지 10년이 흐른 뒤였다. 고 선우 원장님을 모신 성모병원 영안실의 조문객들 틈에 그가 있었다. 말끔한 양복에 검은색 서류 가방을 든 모습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노숙인도 사기꾼도 아니었다. 그는 10년 만에 사업 기반을 잡고 작년부터 조그만 식품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요셉의원을 떠나던 날 그는 원장에게 약속했다. 꼭 성공해서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그는 3년 동안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인슐린을 맞게 해 준 요셉의원이 그의 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돈을 준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런데 10년 전 약속대로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의 영정만이 그를 반겼다. 끝까지 한 노숙인을 믿어 준 아버지의 영정 앞에 그는 170만 원을 내놓았다. 그것은 약값이라는 이름으로 원장님이 그에게 건넨 삶의 밑천이었다.
생물학자들은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 염기 서열이 98퍼센트 이상 같다고 말한다. 단 2퍼센트만 다르다. 인간이 동물적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2퍼센트의 차이가 인간과 동물 사이에 엄청난 격차를 만들었다. 한마디로 그 2퍼센트는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2퍼센트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침팬지와 달리 먼 훗날을 바라보고 자신의 이익에 관계없이 이웃을 돕는다.
이 시대를 ‘약육강식의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정말 약육강식의 논리대로 인간이 살아왔다면 우리는 오래전에 멸망했을 것이다. 2퍼센트야말로 인간의 삶을 동물의 삶과 다르게 만든 문명의 힘인 것이다.
지금 영안실에 누워 말없이 우리를 일깨워 주는 의사 선우 원장님의 삶은 인간이 지닌 2퍼센트를 지키라고 호소한다. IMF가 할퀴고 간 약육강식의 폐허 위에 서 있던 한 노숙인은 그를 위해 묵묵히 인간의 2퍼센트를 지킨 한 의사 덕분에 절망에서 희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속아 주고 이용당했던 어리석은 의사가 옳았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선우 원장님의 곁에는 나를 포함한 아홉 명의 훼방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길을 함께 가자고 원장님께 손 내미신 분, ‘그분’이 계셨다. 20년 전 그 손을 잡던 날부터 ‘그분’이 선우 원장님과 동행했다. 덕분에 혼자 걷는 외로운 길을 부활하신 ‘그분’과 함께 흔들림 없이 걸어갈 수 있었다.
이제 선우 원장님이 남기고 간 요셉의원은 우리를 2퍼센트의 길로 초대한다. 다수가 가지 않는 외로운 길이지만 그 길은 새로운 길이 되어 우리를 기다린다. 그리고 선우 원장님의 표현대로 ‘꽃봉오리 같은 환자’, 선우 원장님이 두고 떠난 가난한 환자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 『2% 다른 길』 중에서
(심명희 지음 / 생활성서사 / 248쪽 / 13,000원) |
|
 |
|
인포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