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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진 물망초, 내 아내 수산나
 
 
2016년 어느 5월 강변북로를 운전하다가 조수석에 앉은 산나가 어지러움을 호소하여 찾아간 병원에서 MRI 판독 결과, 악성뇌종양인 신경교종, 그중에서도 가장 악성인 교모세포종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수술로 뇌 왼쪽의 탁구공만 한 종양을 도려내야 하는데, 그마저도 완치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1~2년 더 사는 데 불과하다고 했다. 결과를 알려주는 의사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어제와 같은 내일이 오지 않을 거라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이틀. 우리가 천상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데 걸린 기간이 딱 이틀이었다. 길어야 1~2년, 그나마 짧은 그 여명조차 시야 협착으로 시력을 점점 잃게 되고, 언어장애가 동반해 사물의 이름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거나 생각대로 말하지 못하고 대부분 실어증으로 이어지며 급기야 정신분열과 함께 기억을 잃고, 나중엔 사지가 마비되는 고통 속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산나 본인은 물론 나와 아이들 모두의 얼굴은 납빛이었고 눈은 모두 충혈되었다. 이 모든 상황이 그저 가위눌림으로 꾼 악몽이었으면….

송두리째 뒤바뀐 일상을 몇 달째 부둥켜안고 지내던 어느 일요일, 미사를 드리고자 아이들에게 엄마를 잠깐 맡기고 성당으로 갔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순간 산나가 가끔 내뱉는 탄식이 떠올랐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나는 욱하니 치밀어 오르는 억울함과 분함을 참지 못하고 십자가를 올려다보았다. “하느님, 산나 말이 틀린 데가 없습니다.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 밖의 기억하지 못한 죄’ 때문인가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짝꿍을 변호하는 아이처럼 얼굴이 벌게져서 ‘내가 다 봤는데 걔 잘못한 거 없다’고 누누이 설명하고 따지고 하다가 어른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이제 숫제 까치발을 하고서 대들고 있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말없이 내려다보는 어른의 침묵에 아이는 문득 자신의 불경을 깨닫고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모으고 이 어른이 큰 수난에 빠졌을 때 하셨던 말씀을 흉내 내 공손히 청하기 시작했다. “하느님,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산나를 비껴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하느님께서 원하는 대로 해 주십시오’ 하는 청은 차마 하지 못했다. 하느님, 어찌해 나의 산나를 버리시나이까….

발병 10개월 만인 2017년 3월 10일로 접어들면서 산나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연체동물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산나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산나를 품에 안고 우리 인생의 마지막 춤을 힘겹게 추고 있다. 수시로 휘청거리는 산나의 모습을 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혼신을 다해 춤을 추고 있다.

절망에 빠져서 휘둘러대는 광기는 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보이는 증상이라 들었지만, 산나는 한 번도 그 비슷한 증세조차 내보인 적이 없었다. 회복 불가능한 상황을 맞아서 어떻게 이토록 평온하고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감탄스러웠다. 냉철한 지성에서 나온 의도적인 대응이라기보다 천성적인 온화함과 유순함, 참을성,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 때문으로 보였다.

어질고 고와서 약하고 외로운 것이 스러져가는 산나의 목숨이건만, 생의 끝자락에 서서 맑은 기품을 잃지 않은 한 마리 나비처럼 곱게, 그러나 힘겹게 날갯짓하고 있구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며 작게 눈을 떴지만, 나와 마주치지는 못한 채 잠시 허공을 맴돌던 초점 없는 눈동자는 이윽고 눈꺼풀 밑으로 힘없이 감추어졌다. 가엾은 사람. 고통만 없으면 좋으련만… 더 이상의 고통만 없다면….

4월 11일. 산나는 떠났다. 잠을 자듯 평온한 모습으로. 웃음이 점점 자라 화사한 함박웃음으로 절정을 이룬 벚꽃이 만개한 바로 그날, 나와 40년을 함께했던 산나의 혼은 육신을 벗어나 꽃밭에 살포시 안겼다. 진단이 내려진 지 정확히 11개월이 되는 날 아침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의식이 살아 있었다. 나는 산나의 귀에 대고 먼저 가서 편히 쉬라고, 아프지도, 헤어지지도 않는 영원한 평안과 안식의 나라로 먼저 가서 피곤했던 몸을 편히 눕히고 나를 기다려달라고 했다.

“당신은 단 하루도 빠지는 날 없이, 내가 죽는 날까지 내 마음속에 나하고 같이 있을 거야. 당신을 만나 함께 살아온 행복한 꽃길도 우리의 삶이었듯이, 지난 1년의 고통스러운 가시밭길 또한 우리의 삶이었어. 당신이 많이 보고 싶을 거야. 그리움의 노래로도, 가슴으로 넘기는 술 석 잔으로도 메울 수 없겠지. 그럴 때마다 난 꽃길보다는, 꽃길이 끝나고 이어진 우리의 혹독했던 가시밭길을 추억할 거야. 내가 당신을 부축해서 힘겹게 한 발 한 발 걸었던 지난 1년의 그 가시밭길을 되돌아보면서 당신과 얘기를 나누고 당신을 쓰다듬고 그럴 거야. 그렇게 당신은 내가 죽는 날까지 내 마음속에 나하고 같이 있을 거야….”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알아들었다는 듯 산나의 오른쪽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마에 조용히 입을 맞추자 굵은 눈물 한 방울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 『너를 놓는다』 중에서
(문숭철 지음 / 영인미디어 / 332쪽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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