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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의 희망과 절망
 
 
서른 살이었을 때, 나는 내 삶이 벼랑 끝에 와 있다고 느꼈다. 벌써 “서른 살이 되었구나”라는 감회에 빠질 틈도 없이 난 생존전선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당시 난 대학원에 휴학계를 내고 어느 자그마한 사회과학 출판사에 어렵게 취직해 막 일을 배우고 있었다. 입사한 지 석 달이 겨우 됐을까 말까. 며칠간의 휴가가 끝날 즈음 회사에 전화를 걸어보니, 이제 나올 필요가 없단다. 그사이에 사장이 바뀌며 내가 ‘짤렸다’는 말이었다.

1991년은 내 생애 최악의 해였다. 내가 짤렸다는 게 실감이 나기도 전에, 난 그 무렵 몇 달째 사귀던 남자에게서 일방적으로 ‘짤리고’ 만다. 실직한 지 한 두어 달쯤 지나서였다. 며칠째 연락이 없던 그에게서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없이 짧게 용건만 말하는 그에게 나 또한 짧게 “알았다”고 말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참담했다. 말하자면 나는 사회로부터 짤리고, 또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여기던 인간으로부터도 짤린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즈음 집안 사정이 엉망이었다. 세 자매의 장녀로서 서른이 다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놀고먹는 나는 기울어 가는 우리집의 혹이며 미운 오리새끼였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내가 채워야 할 하루의 시간들이 먼지처럼 빼곡히 밀려와 방 한구석에 쌓였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도 날 찾지 않았고,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바깥으로 직접 뚫린 창문이 없어 대낮에도 어둠침침하던 방에서 낮을 밤처럼, 밤을 낮처럼 하루하루를 죽이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내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셨다. 그러더니, 다짜고짜로 그때까지도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뭉그적대던 게으른 딸년의 발치를 발로 툭툭 치시며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네 인생은 실패다. 영미야. 나이 서른에 네가 남자가 있냐 애가 있냐. 돈이 있냐 명예가 있냐. 넌 이제까지 뭐 하고 살았니? 네 인생은 실패다. 허껍데기야.”

실- 패-. 껍데기. 당신께서 지나가는 말투로 불쑥 던진 그 말 한마디에 마치 감전되듯 나는 벌떡 일어났다.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그날부터 난 서른 살을 살았다. 난 냉정하게 내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그래서 얻은 건 무엇이고 잃은 건 무엇인지, 무엇이 내게 남아 있는 건지… 나는 나의 무게를, 내 삶의 무게를 세상의 저울에 달아 계량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숨막히는 이 집을 벗어나 어딘가로 가야 했다. 고민 끝에 친구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나, 돈 좀 빌려줘.” “얼마?” “백만원.” 그 말 한마디 떼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 금쪽같은 돈 백만원을 들고 난 무작정 집을 나섰다.

내가 서른 살이었을 때, 나는 신림동의 어느 고시원에 있었다. 고시공부를 하려고 들어간 게 아니라 달리 있을 데가 없어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고시원은 서른이 다 된 여자에게 가장 싸고 안전한 숙소였다. 한 달에 20만원으로 하루 세끼 먹여주고 재워주고 비록 작지만, 내 한 몸은 충분히 누일 수 있는 독방에다 바깥으로 통하는 창문도 있었다. 친구에게서 빌린 돈으로 다섯 달치 방세를 선불하고 나니 수중엔 주머니에 찰랑대는 버스 토큰 몇 개와 백원짜리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가을이 가고 어느덧 겨울이 왔다. 어느 추운 겨울날, 지독한 독감에 걸렸는데 쌍화탕 하나 사 먹을 돈이 없었다. 열이 펄펄 끓는 몸을 끌고 헌책방에 가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팔아 천원짜리 지폐를 손에 쥐었을 때의 쓰라린 감격이란. 그러나 나는 그 시간들을, 이십에서 삼십에 이르는 그 가파른 세월을 잃어버린 것만은 아니었다. 1991년 12월 30일, 허기진 눈만 실없이 쌓이는 밤. 일기장에 나는 이렇게 썼다. 내 인생이 실패였는지는 몰라도 아직 내겐 ‘내’가 남아 있다고. 살아서 시를 쓴다고.
그해 가을에서 겨울까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완벽하게 혼자가 되어 나는 쓰라린 청춘을 회상하며 최초의 시들을 뱉어냈다. 그 핏덩이 같은, 상처받은 짐승의 비명 같은 시들이 모여 어찌어찌하여 등단을 하고 시집을 펴내게 되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나는 오랜 실업자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시인이 되었다. 시집의 제목과 달리 내겐 진짜 잔치가 시작된 셈이다. 남이 차려준 밥상이 아니라 내가 손수 재료를 선택하고 요리한 진정한 밥상. 서른은 내게 그런 나이였다.

마흔을 코앞에 둔 지금, 가끔씩 난 내가 아직도 서른 살이라고 느낀다. 서른 살처럼 옷을 입고 서른 살처럼 비틀거리고 서른 살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 흔한, 그 잘난 희망이 아니라 차라리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질긴 절망을 벗삼아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어 오로지 정든 한숨과 환멸의 힘으로 건너가야 했던 서른 살의 강. 그 강물의 도도한 물살에 맞서 시퍼런 오기로 버텼던 그때 그 시절이 오늘밤 사무치게 그립다.

-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중에서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31쪽 /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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