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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앞에 앉아 잠자는 지원에게
 
 
지원에게

- 서영은(소설가)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네가 이곳을 떠난 지 사 년째가 되고 있다. 너와 함께 했던 성경공부모임을 하다 보면 문득문득 너의 빈자리가 새삼스러워진다. 어느 모임에서든지 너는 항상 한발 물러나 있었지. 너의 존재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놓고 설왕설래하던 이야기가 언쟁에 이를 즈음이면 불현듯 너를 쳐다본다. 그럴 때 너는 누군가에게 먹을 것을 놓아주는 식으로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슬쩍 비켜나가지. 시간이 흐른 뒤 그 모임에서의 너의 얼굴이 떠오르면 그때서야 그 차이가 선명하게 짚이며, “아, 지원이는 어떤 자리에서든 자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구나” 하고 혼자 중얼거리게 된다.

모임에서 말을 많이 하게 되고, 그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돌아서서 그 후유증으로 끙끙 앓게 되는 것은 자의식의 덫에 스스로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너는 일찍부터 남 앞에서 잘난 척할 생각이 없었고, 무엇을 과도하게 지니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너는 타고난 성격 자체가 담백하다. 나이가 들면서 너의 그런 성격은 도를 닦기에 아주 좋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뉴욕에 다녀온 지인들이 너의 소식을 한마디로 “잘 있어”라고 전하는 것은, 네가 그들을 만났을 때 자의식의 화살을 함부로 날려, 그들이 너를 기억할 수밖에 없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주변에 대해 무해한 존재일 수 있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마음의 눈이 귀신을 닮아가서, 누가 척하면 속아 넘어가기는커녕, 다시 속아 넘어가는 척을 하니, 어느 때는 그 노회함이 지긋지긋해진다. 사랑을 해보고 싶어도 자신에게서나 상대에게서나 그런 ‘척’이 빤히 들여다보이니 무슨 수로 그 젖은 장작더미에 불을 지필 수 있으리오.

그건 그렇고, 최근에 내가 접한 너의 소식은 감동을 해야 할지 언짢아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다. 하나는 네가 언젠가부터 머리 염색을 그만두었다는 것. 그래서 새로 나는 머리카락 밑뿌리는 하얗고, 다른 부분은 까매서 그 흑백 대조가 까치를 닮았다는 것인데, 그것은 네가 이제 더 이상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무언중의 선언으로 받아들여진다(하기는 우리 나이의 사람이 외모에 신경 쓴다고 해서, 어느 눈먼 베르테르가 속아 넘어가줄까마는……).

또 다른 하나는, 네가 원룸식의 집에 아들과 함께 지내는데, 아들을 조금이라도 성가시게 하지 않으려고, 아들이 퇴근해서 돌아오면 골방 같은 작은 공간에 문을 닫고 들어앉는다는 것. 그 공간은 너무 비좁아 책상 하나 놓는 것으로 꽉 차서, 너는 그 책상에 앉아서 잠을 잔다는 것.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조차도 작은 성가심이라도 주지 않으려고 그 많은 밤들을 책상에서 잔다는 것. 이런 너의 태도는, 그동안 네가 이 세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네 자리를 더 작고 더 좁게 만들어서 너의 존재의 체적을 줄이고 또 줄여온 것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원아.

나는 요즘 한밤중이면 잠이 깨어 어두운 천장을 가만히 쳐다보곤 한다. 의식이 마치 임종을 앞둔 사람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점차 거둬들여지고, 오직 하늘과 나만 마주한 상태가 되었을 때, 내게 남는 마지막 의식의 끈은 ‘오! 나의 죄!’에 집중된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할지라도 인간이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는 인식 앞에서는 그 어떤 노력도 허사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을 때, 어떻게 하나, 나는. 이 두려움은 믿음으로밖에 풀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의 그런 태도가 주변을 섬기는 자세의 변형이라고 본다. 하지만 섬기는 것이 참된 것이었는지 아닌지는 그 관계의 결과가 말해준다. A와 B의 관계가 짐이 되는 관계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관계를 통해 하나 되는 다리를 확실히 놓느냐, 못 놓느냐,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진정한 사랑은 관계의 다리를 통해 그 사랑의 씨앗을 무한히 확산시켜가는 것인데, 네가 누구도 성가시게 하지 않으려고 자기 존재의 부피를 접고 또 접는 그 마음의 동기 속에 사랑의 씨앗이 있는지는 반드시 한번 짚어보아야만 할 것 같다. 사랑은 곧 믿음인데, 믿음의 관계에서는 오히려 맘 턱 놓고 짐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네가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으려고 그토록 조심하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성가시게 하겠니. 피차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우리 사이에 믿음의 다리가 놓아질 수 없겠지.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헛것을 붙잡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를 수박처럼 퍽 쪼개서 하늘 앞에서 자기 검증을 받아야 할 때이다.


- 『작가들의 연애편지』 중에서
(김다은 엮음 / 생각의 나무 / 221쪽 /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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