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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고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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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선생님은 작가 중에서 내게 세 번째로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었다. 출판을 시작한
이래 많은 소설가, 시인들과 교분을 맺으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느꼈다.
당대의 유명한 거의 모든 작가들과 가졌던 길고 짧은 만남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내게 영향
을 미쳤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분으로는 구상 선생님과 이청준 선
생님 외에 김성일 선생님이 있었다.
83년 11월 4일, 당시 한국일보 편집 부국장이던 정달영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꼭 소
개시켜 줄 사람이 있으니 함께 점심이나 하자는 것이었다. 약속 장소인 안국동의 한정식 집
에 갔을 때, 정달영 부국장이 소개한 사람이 바로 소설가이자 대우중공업 부장이던 김성일
선생님이었다. 6척 장신에 배우처럼 잘 생긴 분이었다. 정 부국장은 서로 알고 지내면 매우
좋은 교분이 맺어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지금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김성일 선생님의
연재소설 <땅끝에서 오다>를 읽고 있느냐고 물었다.
일반적으로 신문연재 소설은 통속소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나는 신문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앞에 앉아 있는 김성일 선생님께는 미안했지만 아니라고 대답했다. 정 부국장은 나
더러 그 소설을 읽어보고 웬만하면 홍성사의 <믿음의 글들>로 출판하면 좋겠다는 말을 하
였다. 마침 김성일 선생님이 원고를 갖고 있었다. 나는 원고를 읽어본 다음 김 선생님께 직
접 연락을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날 김성일 선생님과의 만남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점심식사 도중에 정 부국장이 맥주를
시켰다. 정 부국장은 카톨릭 신자였으므로 거리낌 없이 맥주를 마셨고 나는 개신교 집사이
면서도 기꺼이 마셨다. 물론 담배도 피워댔다. 그런데 김성일 선생님은 술과 담배를 일체 손
에 대지 않았다. 아예 술잔을 받지조차 않았다. 나는 김성일 선생님에게 본래 술 담배를 못
하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끊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김 선
생님으로부터 매우 강한 인상을 받았다. 문단에 수없이 많은 크리스천들이 있지만 예수님
때문에 술 담배를 끊었다고 자신있게 대답하는 사람을 나는 그날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더
욱이 대우중공업의 간부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은 확실히 내게는 '사건'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온 나는 오후 3시경부터 <땅끝에서 오다>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읽기
까지 나는 전화도 받지 않고 자리에서 한번 일어서지도 않았다. 그만큼 그 소설이 나를 사
로잡았기 때문이다. 그처럼 좋은 소설이 <믿음의 글들>의 식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
총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날밤 당장 김성일 선생님에게 출판할 것을 통보하였다. 김 선
생님이 그 소설을 쓸 때에 홍성사의 <믿음의 글들>에 넣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었다
는 사실은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땅끝에서 오다>를 출판하게 되면서 김성일 선생님과 자연히 자주 만나게 되었고, 나는 많
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84년 7월 31일이었다. 그날 사무실을 찾아온 김 선생님과 저녁식사
를 함께 하게 되었다. 평소 때처럼 나는 술을 마셨다. 같은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그는 술
잔에 손도 대지 않는 판국에 나 혼자 마냥 마시기가 좀 민망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내 자신을 합리화하며 변명할 기회를 갖기 위해 크리스천의 음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교회의 전통에 따라 금하는 것이 좋
다는 답변을 하였다. 나는 그런 경우를 위해 늘 준비해 두고 있던 질문으로 오히려 역공을
펼쳤다. 즉, 같은 크리스천임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의 신부님들의 흡연과 음주는 왜 문제 삼
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만약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나의 음주 또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 않느냐는 논리였다.
이 질문에 대해 내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사람을 나는 그동안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신부님들이야말로 나의 흡연과 음주행각을 합법화시켜 주는 구세
주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날 김 선생님의 답변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가톨릭의 신부님들이 술이나 담배를 하기 때문에 나도 할 수 있다는 이 사장의 생각에 나
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은 주님께 그들의 가장 귀한 것을 바친 분들입니다. 동정이
지요. 그것은 사실은 그분들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 사장이
신부님들처럼 이 사장의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바친 삶을 살고 있다면, 이 사장 자신을 위
해 술이나 담배 정도를 즐긴다 한들 무방하겠지요. 그러나 주님께 아무 것도 드린 것이 없
으면서 유독 음주와 흡연에 국한하여 자신을 신부님과 일치시킨다면, 그것은 교만이거나 죄
악이 아닐까요? 우리가 신부님들처럼 우리의 가장 귀한 동정을 드릴 수 없게 된 바에야 나
자신을 위해 술 담배를 즐기고 싶은 마음 정도는 당연히 주님께 드려야 되지 않을까요?"
그것은 참으로 내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아니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
가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과연 주님께 무슨 귀한 것을 드렸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무 것도 없었다. 늘 드린다고 입으로 외치기만 했을 뿐 실제로는 드린 것이 아무
것도 없없다. 오히려 받기 위해서만 안달했을 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였다.
87년 2월 마지막날 나를 찾아온 김 선생님은 원고 뭉치를 꺼내놓았다. 새로 쓴 장편소설 원
고인데 듣자하니 홍성사가 부도가 나서 어렵다는데, 만약 도움이 된다면 출판하라는 것이었
다. 나는 평소 김 선생님의 믿음과 인품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놀랐다.
출판사가 일단 부도나면 맡겨 놓았던 원고도 찾아가는 것이 세상인심이다. 그러므로 부도난
회사가 새로운 투자 없이 작가의 새 원고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김 선생님은 부도난 홍성사를 자기 발로 걸어와서 아무데도 발표한 적이 없는, 그야
말로 '전작 장편소설' 원고를 아무 조건 없이 맡긴 것이다. 그 때는 이미 <땅끝에서 오다>
와 그 후편인 <땅끝으로 가다>가 인기리에 발매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많은 출판사들
이 김성일 선생님의 다음 작품을 노리고 있을 때였다. 만약 다른 출판사에 가져갔다면 계약
금만 해도 엄청난 돈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성사에서는 계약금은 고사하고 언
제 책이 나올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선생님은 오직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고 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새로운 원고를, 그것도 장편소설 두 권 분량의
원고를 내게 들고 왔던 것이다.
부도난 회사가 작가의 '전작 장편소설' 두 권을 동시에 출판한다는 것은, 서점이나 거래처와
의 관계에서 볼 때 실추된 명예와 신용을 회복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다. 나는 그날
밤도 거의 뜬 눈으로 새웠다. 김 선생님이 너무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많은 것을
생각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나
눔의 삶을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지....
- 이 재철 목사 저 <믿음의 글들, 나의 고백>(홍성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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