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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기
 
 

어릴 적 나는 사람들과 반려동물이 죽었을 때, 마치 커다란 지우개가 와서 그들을 쓱쓱 지워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늘 시도 때도 없이 상념에 빠져 있는 내게 사람들은 말했다.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라.” 선생님들은 생활기록부에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고 염려가 많다고 썼다. 부모님은 매일 밤 나를 위해 기도했지만, 나는 기도를 하기엔 아는 것이 너무 많고 똑똑했다. 그렇다. 나처럼 지적이고 예술적인 사람에게 신은 너무 뻔하고 싱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보았다.
내 방 유리창 커튼을 젖혔을 때
눈부신 햇빛 아래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할아버지의 굽은 등을.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씀을 결코 한 적이 없었다. 그 쉬운 일을 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기도라는, 그 어려운 일을 하고 계셨다. 더듬더듬 나를 위한 기도를 읊조리던 할아버지는 며칠 후 당신이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이라는 걸 알고 계셨다. 나도 그걸 알고 있었더라면, 할아버지의 등을 좀 더 자세히 봐두려고 애썼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내게 기도를 선물하고, 지워지셨다.

그리고 캐럴, 그래, 캐럴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캐럴의 아빠, 찰리의 이야기를. 캐럴은 우리 집 보모였다. 내 기억 속의 캐럴은 나보다 한두 살 많은 열일곱 살쯤이다. 어느 날 밤, 책을 보다가 배가 고파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참이었다. 그래, 나는 그때 또 하나의 등을 보았다. 그녀는 식사를 준비하면서 틈틈이 두 손을 모았다. 그녀의 모은 두 손 위로 고요와 평화가 내려앉고 있었다.

“기도하고 있었어? 어서 돈을 많이 벌어 우리 집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나는 되바라진 아이답게 특유의 말투로 물었다. 그러자 캐럴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맞아. 기도하고 있었어. 앤 라모트의 집에서 오래 있게 해달라고.”
“무슨 말이야? 계속 가난하게 살고 싶다는 거야?” 그때 캐럴이 나의 뺨을 어루만지며 아름답게 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야 우리 아빠가 조금이나마 편하시거든.”

혼란스러워진 나는 다시 집요하게 물었다.
“가난한 아빠가 밉지 않아?”
“네 말대로 아빠는 돈이 별로 없으셔. 하지만 아빠는 돈보다 더 값진 것을 갖고 계시단다.”
“그게 뭔데?”
“사랑.”
“사랑?”
“그래, 사랑.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거야, 앤. 그래서 우리는 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아. 그리고 가진 게 별로 없기 때문에 아빠와 나는 서로에 대한 사랑에 더욱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거야. 우린… 사랑은 정말 많거든.”

그리고 얼마 후 캐럴을 데리러 우리 집을 방문한 찰리를 보았다. “음, 네가 똑똑한 앤 라모트구나. 나는 찰리란다.” 찰리가 내게 악수를 청하려다가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래, 그 찰나의 순간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테지. 못이 굳게 박이고 잘못 내려친 망치 때문인지 엄지손톱이 퍼렇게 변해 있던 커다란 손. 궁금한 걸 조금도 참지 못하는 나는 당돌하게 물었다. “찰리 아저씨, 사랑이 뭐예요?” 어리둥절해진 찰리의 눈을 보며 나는 다그쳤다. “사랑이 뭐냐고요!”

“사랑은… 그러니까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란다.”

찰리는 캐럴을 데리고 가면서 우리 식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찰리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찰리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을 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설고 거친 촉감이 따뜻한 온기로 변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깨달았다. 한 번도 서로 만나지 못한 두 손이 서로를 위해 맞대질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아빠의 부드러운 손을 사랑했다. 그리고 이제 찰리의 거친 손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찰리와 캐럴은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문득 나는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눈물이 흘렀고 아빠가 내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앤?” 나는 코를 풀며 환하게 웃었다. “네, 많은 일이 일어났어요.”

할아버지와 찰리, 캐럴이 사라진 후부터 나는 틈이 나는 대로 기도하는 삶을 살고 있다. 기도를 하면 언제나 신이 내 곁에 가까이 와 있다고 상상할 수 있었다. 신이 우리 곁에 가까이 있으면, 우리는 더 좋은 삶을 상상하게 된다. 아주 조금, 아주 잠깐이라도 자신과 타인에게 나도 모르게 친절해지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그건 모두 당신이 더 좋은 삶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갈 힘은 더 좋은 삶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는 데서 나온다.

- 『가벼운 삶의 기쁨』 중에서
(앤 라모트 지음 / 나무의철학 / 240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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