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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의 둥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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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우린 아내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태풍 속에 휩싸여 결혼을 했다. 캐나다에 있는
그녀의 집을 처음 방문한 날 지하 창고에 곱게 챙겨져 있는 갖가지 물건들을 보았다.
어릴 적 놀던 인형, 노트 등등 딸아이의 자취마저 귀히 간직하고 있는 그 집 모서리
모서리에서 난 늘 뛰어들어 함께 살고팠던 사랑의 실체를 보았다. 그리고 난 그녀와 함께
그런 울타리를 만들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하나 둘 직접 쌓아 올리면서야 난 비로소 사랑의
진정한 실체를 알게 되었다. 갈등과 서운함과 오해...그럼에도 땀과 노력과 자신을 깍아내는
희생으로 서로에게 서로의 의미를 충족시켜 주는 사랑의 실체를. 나는 부모가 같이 사는 모
습을 보고 자라지 못했기에 부부 싸움이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서로를 맞춰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히 해결하는 과정이 서툴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재에서 책을 찾다가 커다란 노트를 보게 되었다. 세상에! 아내가 그려 둔
만화였다. 자기 얘기는 듣지도 않는 나를 향해 하고픈 모든 말들을 혼자서 만화로 그렸던 것
이다. 서툰 한글로 대사까지 적어서 왜 그때 싸움이 나게 되었고 전후 좌우에 어떤 일이 있
어서 서로 오해가 생기게 되었는지가 만화 속에 다 그려져 있었다. 서로의 입장을 알고보면
이렇듯 별거 아닌 것을 그리도 심각히 받아들였던 나 자신도 우스웠지만 이걸 만화로 그린
아내가 너무 재미있고 사랑스러워서 난 껄껄거리며 한참을 웃어제꼈다. 이게 결혼이고 부부고
가정인 듯 했다.
하지만 아내와 나 둘 다 아무리 사랑을 받는다 해도 늘 부족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나
는 채워야 할 사랑의 분량이 너무 컸고 아내는 항상 받아 왔던 사랑의 분량이 너무 컸다.
더구나 기대치에 비해 둘 다 사랑을 준 경험이 없었다. 나는 충분히 받지 못해 주는 방법을
몰랐고 아내는 넘치도록 받기만 해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신혼 초에 아내가 애써
만든 서툰 요리를 먹으며 난 맛이 없다는 사실 자체보다 정이 없는 음식을 먹는다는 느낌에
힘들어 했다. 여자들은 다 요리를 잘하는 줄 알았기에 왜 좀더 내게 사랑을 담아 식탁에 올
리지 않는가 답답해 했었다. 나의 천사가 왜 내게 무한한 사랑을 쏟아 부어 주지 않는 걸
까? 마치 돌을 들고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피는 사람처럼 난 그렇게 아내의 행동 하나
하나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가 그려 온 가정이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아내는 아내대로 그런 나를 보면서 힘들어 했다.
우리의 만남과 결혼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확신했지만 그 축복의 첫걸음이 서로에게 너무 버
거워 아내는 지금도 신혼의 일 년이 사십 년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힘겨
운 과정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내가 아닌 상대를 중심에 놓는 희생의 기쁨을 터득하게 되었
다. 그리곤 아내가 임신을 했고 나는 아빠가 되었다.
2000년. 지금 내 아들 유성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 순간 화를
낸 나 자신이 두려워졌다. 유성이의 겁먹은 표정에서 잊고 있었던 어린 내 모습이 보였다.
다칠까봐 뭐라 한건데, 근데 난 왜 좀더 부드럽게 타이르지를 못하는 것일까? 다른 아버지
들은 나처럼 안 할 것만 같다. 난 정말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일 수 있을까? 내가 그려 온
가정의 모습이 실제로도 가능한 걸까? 어쩌면 나의 결혼 생활은 항상 나를 괴롭혀 온 이런
의문에 답하는 과정일 수 있었다. 유성이에게 아내가 눈을 찡긋하고 있다. 아마도 나를 건드
리지 말고 조용히 기다려 주자는 둘만의 신호일 것이다. 아무 말 없이 내게서 나올 다음 말
을 기다리는 유성이를 보면서 다시금 뭔가가 물밀 듯 차 올랐다.
유성이가 태어난 이래 난 항상 가슴을 데우는 뜨거움으로 목젖이 떨려 왔다. 유성이가 태어
나면서 난 아내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녀는 내 사랑을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사랑을 아이에게 쏟아 붓는 내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 사랑을 보면서 내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유성이도 함께 그 사랑 속에 잠기어 갔다. 유성이와 더불어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밤새 울어대는 아이를 언제나 부드러운 손길과 미소로 안고 있는 어머니. 그 어머니는 아이
때문에 한숨을 못 잤으면서도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운 자태로 나를 위해 식사를 준비
했다. 나는 그런 아내의 뒷모습을 감격하며 바라보곤 했다.
유성이는 자랄수록 더욱 나를 꽉 채웠다. 내 그릇에 있는 자장면을 먹고 싶어하는 내 아들을
위해 젓가락으로 돌돌 면을 말아 먹일 때면 나는 저 깊은 배고픔이 드디어 채워짐을 느꼈다.
“유성아 너무 크게 얘기해서 미안해.” 그 말 한마디에 유성이는 “아빠”를 소리쳐 부르며
내 품으로 달려온다. 아들과 난 서로를 껴안고 거실을 뒹군다. 한 점 의심도 없는 유성이의
사랑이,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내 아들이 바다가 되어 나를 한없이 채워 준다.
내게 주어진 이 절대적 사랑 앞에서 난 하나님을 느낀다. 그 누구도 긍정해 주지 않던 나를
채우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그리고 나는 그런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두 개구쟁이를 뜯어말리며 아내가 식탁으로 우리를 이끈다. 국을 놓는 아내 옆에서 유성이가
그 작은 손으로 수저를 찾아 내 앞에 놓더니 다시 컵에다 물을 담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아빠 아빠 맛있어!” 신나하며 내 아들이 연신 재잘거리고, 그 옆에는 재잘거리는 아이만
큼이나 해맑은 미소를 가진 아내가 있다.
그래 바로 이 가정이 있기에, 이 가정을 주셨기에 비로소 오늘의 내가 의미를 갖는 것이리라.
유성이가 포크로 참외를 찍어 내게로 왔다. 난 그런 유성이를 한 팔로 덥석 안고, 또 다른 팔
로는 과일을 깎고 있던 아내 손을 잡고는 베란다로 나갔다. 창문을 열었다. 저 멀리서 새가
날아가고 있다. 힘차게, 유유히 그리고 너무도 자유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며 날고 있다.
내 모습 이대로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둥지를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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